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녹산의 난 (문단 편집) === [[봉상청]]의 필사적인 방어와 실패 - [[낙양]] 함락 === 당의 대응으로 파견된 사령관 중 가장 먼저 안녹산군 본대와 맞닥뜨린 것은 하남절도사 장개연이었는데, 치소인 진류에 도착했지만 방금 급조된 자리인 데다가 [[중국]]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진류에 기존 병력이랄 것도 거의 없었으니 불과 며칠 만에 안녹산 본대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참살당했다. 하지만 장개연의 죽음은 무의미하지 않았는데, 전투 과정에서 '''장개연에게 협력한 진류성의 주민이 안녹산에게 모두 [[학살]]당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안녹산군이 누려왔던 양국충 타도라든가, 황제의 밀명이라든지 하는 명분이 일거에 싹 사라진 것은 물론 안녹산군의 잔인한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 탓에 일반 백성들이 안녹산군을 적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안녹산군은 제대로 된 저항을 받기 시작했다. ~~[[신안대학살|이런 빡대가리짓을]] [[항우|하는 사람을 예전에도 본 것 같은데...]]~~ 이후 [[낙양]] 방면에서 최전방에 나선 봉상청은 말 그대로 필사적인 방어전을 시도했다. 무뢰에서 저지를 시도했으나 참패했고, 잔존 병력을 재편해 규원에서 다시 방어전을 펼쳤지만 또 패배했다. 그후 낙양성 상동문 안에서 시가전을 벌였지만 다시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상청은 낙양성 안에 설치되어 있었던 도정역에서 다시 시가전을 시도했으나 또 패배했고, 선안문에서 다시 한번 방어선을 펼쳐 보려 했으나 역시나 패배 --[[근성]]이다.-- 한 후 간신히 남은 병력을 모아 섬군으로 가 고선지와 합류했다. 10일만에 되는대로 긁어모은 60,000여 명의 병력으로 150,000명에 달하는 정예군단을 상대로 몇 번씩이나 방어전을 시도하고, 격파된 병력을 다시 모아 방어선을 치니 이걸 근성이라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흩어진 병력을 다시 모으는 것이 극히 어려운 일이란 점을 생각하면 봉상청의 통솔력은 확실히 우수한 편이란 평가는 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안사의 난]] 한 달 만에 [[낙양]]이 함락'''되자[* 한 달이나 되는 시간을 벌었다는 것에는 높은 평가를 줄 수 있다. 나라 꼴이 정상적이었다면 ~~애초에 반란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겠지~~ 저 한 달 동안 후방의 병력을 결집하여 끌어올렸어야 한다.] 섬군을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여긴 봉상청과 고선지는 동관으로 철수했고 동관을 요새화, 방어태세를 정비한다. 직후 안녹산군이 접근했지만 간신히 방어한다. 이후 안녹산은 최건우를 선봉으로 내세워 섬군에 배치, 동관 공략을 노리는데 임여, 홍농, 제음, 복양, 운중군이 안녹산의 기세에 놀라 항복했다. 그러나 안녹산이 칭제를 위해 낙양에서 움직이지 않자 장안의 당 조정은 병사들을 좀 더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당 조정은 엄청난 실책을 저지른다.''' 봉상청이 세 번이나 올린 표는 보지 않고 감군 변령성이 올린 패전보고만을 받아봤으며, 변령성이 고선지에 대해 원한을 품고 올린 "봉상청은 적을 이용하여 병사들을 흔들었고, 고선지는 섬군 땅 수백 리를 버렸으며, 또 줄어든 군사들의 식량으로 내린 것을 도둑질했습니다"라고 참소(간단히 요약하자면 '물러난 게 죄'라는 내용)한 것을 보고는 둘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이러한 당의 행동은 당시부터 현재까지 전형적인 '''[[뻘짓]]'''으로 평가받는다. 봉상청은 이때에 죽으면서도 안녹산의 형세가 위협적이란 것을 알리는 표문을 올렸고, 고선지가 죽을 때에는 자신의 휘하 병사들에게 "내 죽음이 정당하지 않으면 '억울하다'라고 외쳐달라."라고 말하자 이에 병사들이 "억울하다! 억울하다!"라고 외친 소리에 땅이 흔들릴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억울한 죽음|이로써 한때 서역을 정벌한 당의 일대명장 고선지와 부장 봉상청은 억울하게 처형되었다.]] 어쨌든 동관을 지키던 당에 충성스러운 두 장군이 죽은 공백을 메꾸어야 했는데, 때마침 두 개 절도사를 겸직하던 [[가서한]]이 병이 들어 집에 돌아와 있는 것을 불러 병마부원수로 제수하고 충원병력 8만을 이끌고 동관으로 보낸다. 가서한이 대[[토번]], 대돌궐 전역에서 명성이 자자한 당 최고의 숙장이었고, [[이민족]] 출신 중에서 '''[[안녹산]]과 사이가 매우 나쁘다'''는 사적인 이유까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때 당이 동관에 배치한 20만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가서한은 전량구를 어사중승으로, 소흔을 [[판관]]으로, 화발귀인[* 번장, 즉, 이민족으로써 자기 부족의 병력을 이끄는 장수.] 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 병력을 거느리고 따르게 해 동관에서 고선지가 이끌던 병력과 합류, 그 ~~한심한~~ 꼬라지의~~ 20만 대군을 눈으로 확인한 다음 안녹산 본대에 대한 방어전에 들어간다. 전황이 당에게 유리하게 넘어간 것은 태원 방면부터였다. 안녹산은 낙양까지는 쉽게 점령할 수 있을지 모르나 동관 돌파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태원부를 장악하고 장안으로 가는 다른 길을 뚫는 것을 상당히 중시했다. 자신의 오른팔로 신임하던 사사명에게 본대병력이라 할 수 있는 군진을 맡겨서 태원으로 보낸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에 구당서에 따르면 안녹산은 자신의 주 기반 중 한곳인 하동지역을 맡겼던 대동군사 고수암으로 하여금 하곡 일대까지 진출시켰는데, 이는 범양에서 전진해 오기 때문에 시간도 오래 걸리고 피로도 더할 사사명 부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대응한 것이 막 삭방절도사직에 오른 [[곽자의]]였다. 진무군까지 전진한 고수암군을 대파한 곽자의는 내친김에 정변군까지 진격했으며, 대동병마사 설충의가 정변군으로 공격해 들어오자 이를 다시 한번 격파해 7천여 명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이 전투에서부터 이후 시대의 주요 인물들로 거론되는 여러 [[장군]]들의 이름[* 삭방좌상병마사 [[이광필]], 우상병마사 고준, 좌무봉사 [[복고회은]], 우무봉사 [[혼석지]]([[혼감]], 통칭 혼태사의 아버지) 등]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에 곽자의는 하동진으로 진격, 운중([[대동]])을 포위함과 동시에 공손경암이 이끄는 별동대를 보내 마읍([[삭주]])을 함락했으며, 태행 8형 중 다소 북쪽에 쏠려 있던 동형관을 장악한다. 곽자의는 이 전공으로 [[어사대부]]직을 받으며, 이후 혼란기 당의 최고의 위상을 가진 장군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곽자의의 이러한 진격은 안녹산의 주요 기반 중 하나였던 하동진을 당이 대부분 회복했음을 뜻하며, 안녹산의 다른 본거지인 범양, 평로진까지 [[당]]의 위협에 직면함을 뜻한다. 안녹산은 낙양을 함락한 다음 장통오를 수양태수, 양조종을 진류장사로 임명하고 [[호족]] 기병 1천여를 편성해 동쪽으로 보내는데, 동평태수 사오왕 이지, 제남태수 이수가 이를 막고 장통오를 처형한다.[* 참고로 이지와 이수는 둘 다 [[종실]]이다. 현종은 ~~자식들을 홀대한 것과는 달리~~ 종실, 특히 자신의 형제들과 정이 깊은 모습을 보여왔고, 그로 인해 종실들은 이런 대위기 극복을 위해 앞장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